기사제목 조창조 6-70년대 주름잡던 전국구 주먹이 조희팔 사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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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창조 6-70년대 주름잡던 전국구 주먹이 조희팔 사건에?

조창조 조희팔 커넥션 있나? 팔순 ‘낭만파 보스’ 검찰 출두
기사입력 2016.05.12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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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앤뉴스 박귀성 기자]=조창조가 나타났다. 조희팔 돈 흐름 과정에 조창조씨의 검찰 출두까지 이어졌다. 조희팔(59) 수조원대 유사수신 사기와 관련 검찰이 수사 중에 조창조 마지막 낭판파 주먹 보스가 수사선상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검찰벽문양2.jpg
 
조창조씨는 한때 대구의 시라소니라 불리며 칼잡이건달이 등장하기 전까지 마지막 낭만파(맨주먹 싸움파) 건달이었다. 검찰이 조희팔 관련 수사에서 조희팔 측의 범죄수익금 중 일부가 조창조씨 관련 업체로 흘러간 정황을 포착한 한 것이 조창조씨의 검찰 출두 사유가 됐다.
 
대구지검의 한 관계자는 지난 11조희팔 측의 범죄수익금 가운데 수억원이 수도권과 경남 지역에서 조창조씨가 관여하는 재개발 사업체 등으로 흘러간 정황이 있어 자금 규모, 유입 경로, 사용처 등을 집중 조사하는 중이라고 전언했다.
 
조창조씨는 10참고인자격으로 대구지검에 나와 오후 늦게까지 조사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으며 당시 조창조씨는 조희팔 사건과의 연관성을 부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창조씨가 세칭 건달에서 사업가로 변신한 것은 1990년대 후반으로 알려져 있지만, 확실한 시간적 구분점은 없다.
 
조창조씨는 이번 검찰 수사에서 지난 2006년에서 2008년 사이 조희팔 측 자금 일부가 지인 등 주변 사업체에 들어왔지만 법적으로 문제없는 투자금이었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대구지검은 지난 20151012일 강태용씨가 도피 7년 만인 1010일 낮에 중국 장쑤성 우시시 소재의 한 아파트에서 중국 공안에 체포됐다고 밝힌 바 있다. 강태용씨는 강제 송환됐고 현재 수감 중이다.
 
대구지검은 이런 강태용씨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주변 인물들의 계좌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조창조씨 주변으로 조희팔 측 자금이 투입된 관련 자료를 확보했다. 조창조씨 주변인과 검찰과 경찰, 조씨 관련 지인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조창조씨는 애초에 조희팔을 직접적으로 알지는 못했다고 한다. 마만, 2004년에서 2008년경 조희팔이 유사수신 사업을 할 때 주변인들에게 조창조씨 소개를 부탁해서 서로 면식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는 조창조씨 역시 주먹계를 조양은, 김태촌 등 칼잡이 건달시대에 내주고 사업에 몸을 담았던 시절로, 때문에 조창조씨와 조희팔의 조우는 자연스러웠을 수도 있다.
 
언론에 따르면, 조희팔의 한 지인은 조창조씨와 조희팔의 만남에 대해 “2007년께로 기억한다. 조희팔이 주변 사람들에게 창조 형님이라고 과시했다면서 조희팔이 의도적으로 조창조씨에게 접근해 친분을 맺은 다음 투자를 한 것으로 안다고 설명했다.
 
검찰은 조창조씨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조창조씨 주변인 및 가족까지 소환할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는 조희팔의 자금 전달 경로를 명확하게 들여다보겠다는 검찰의 의지로 풀이된다. 검찰 관계자는 조창조씨는 조폭들의 대부일 뿐 아니라 이명박 정권 당시 실세였던 모 정치인과 친분이 있다는 구설이 있다면서 범죄수익금의 적고 많음을 떠나 자금 출처와 사용처를 세밀하게 살피는 이유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평양에서 태어난 조창조씨는 광복 직후 8세때 남한으로 내려와 서울 종로의 덕수초등학교를 다니다가 강원도의 묵호와 부산을 거쳐 대구에서 살게 됐다. 당시 외삼촌이 경북 달성군에 있는 광산에서 기계과장으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창조씨가 대구에 정착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6.25남북동족상잔이 발발했다.
 
북에서 내려오고 전쟁을 겪는 동안 조창조씨 진학은 3년이나 늦춰졌다. 중학생 시절에 벌써 고등학생 나이가 됐고, 이때부터 주먹싸움에 대해 대구에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이명박 정부 당시 실세 인사 가운데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이 조창조씨의 대륜고 3년 선배다. 조창조씨는 학창시절 최시중 위원장과 호형호제하며 친분을 쌓았다.
 
또한 당시 대구 어깨들과 싸움판에서 맺어진 인연들도 적지 않았는데, 조창조씨와 친분이 있던 몇몇 가운데 훗날 출세한 인사가 적지 않다. 예를 들어 유도에 능했던 전경환씨는 형이자 내란범 전두환이 대통령이 된 후 새마을운동중앙본부 회장으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고, 엄삼탁씨는 6공 때 안기부 기조실장까지 올랐다. 씨름선수던 김학룡씨는 뒷날 민속씨름 초대심판위원장과 일양약품 씨름단 감독을 역임했다.
 
조창조씨는 훗날 서울로 올라와 서울역 근처 염천시장 상인협회에 적을 두고 일대를 주먹으로 장악하고 무교동의 호남 출신 건달패들의 뒤를 봐주기도 했다. 지난 1987년 대선 당시엔 내란범 노태우 후보의 사조직태림회(정치깡패 조직)에서 활동했다.
 
조창조씨의 주먹인생을 회고하면서, 내란으로 정권을 탈취한 전두환이 5.18광주학살만행을 저지름과 동시에 폭력조직 소탕을 부르짖으며 설립한 악명 높은 삼청교육대는 사실 진정한 폭력배를 교화시키기 보다는 정적제거와 사회 공포분위용으로 봐야할 대목이 있다.
 
사실 우리나라 건달(조직폭력배)들이 가장 융성했던 시기가 박정희 전두환 시절이었다. 전두환 정권 당시는 그야말로 조폭들의 군웅할거였다. 삼청교육대 입소자는 조폭들은 일부였고, 대부분이 거리의 부랑배나 범죄와 아무런 상관도 없이 무차별적으로 끌려간 시민들이었다. 전두환 노태우는 오히려 전국구 깡패조직을 정치적으로 등용했던 인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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